공산주의의 역사

2022. 9. 8. 07:47- 새일교회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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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2iFUyPLh7-M

공산주의의 역사

공산주의의 역사라는 책입니다. 책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공산주의라는 말은 1840년대 파리에서 생겨났습니다.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먼저는 공산주의라는 이상, 그리고 이상을 이루기 위한 실천계획, 그리고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세워진 정권입니다.

이상
공산주의는 플라톤의 일부 저서에 있는 것과 같이 개인이 공동체 속에서 소멸되는 극단적 형태의 사회적 완전 평등을 의미합니다.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은 불평등한 소유에서 기인하므로, 완전한 평등은 내 것, 네 것, 즉 사유재산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쟁과 다툼은 소유하려는 욕망 때문에 발생하므로, 욕망이 평등해져야 하며, 결국 인간성에 대한 문제에까지 확장됩니다. 영국 철학자 존 로크는 이기심을 억누르는 인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암시했고, 프랑스 사상가 엘베티우스는 적절한 교육과 강력한 입법을 통해 인간이 완벽한 덕을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레닌이 세운 공산정권도 새로운 인간을 창조할 목적으로 실행한 대중교육의 장대한 실험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욕심을 비롯해 어떤 악덕도 지니지 않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천계획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으로 앞서 설명한 공산주의라는 이상을 구체화했고, 소위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명명했습니다. ‘과학적’이라는 표현은 다윈의 진화론, 생물이 도태와 향상을 통해 진화한다는 이론의 영향을 받아, 인간사회도 발전하는 과정을 거쳐 결국에는 ‘필연적으로’ 사유재산이 없이 평등한 사회가 오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행위가 이 과정을 다소간 늦추거나 가속시킬 수 있지만 방향을 바꿀 수는 없고, 자본주의는 반드시 사회주의에 굴복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좌절을 겪을지라도 궁극적으로 승리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전개된 인간 사회의 역사는 모두 생산수단을 가진 계급과 그렇지 못한 계급의 투쟁의 역사였고, 자본주의는 계급사회의 마지막 단계이며,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될 착취당하는 산업 노동자들의 혁명으로 계급없는 사회가 도래할 것이고, 이 시점에서 역사는 완전히 정지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물질로부터 완전히 해방됩니다. 다만, 자본주의의 붕괴와 공산주의의 도래 사이에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라는 과도기 단계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세워진 정권
1917년-1991년까지의 러시아는 이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세워진 정권이었습니다. 레닌은 노동자 계급의 독재가 사유재산을 없애고 재산 없는 평등한 사회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의 실천계획과는 다르게, 혁명이 발생한 러시아는 산업 국가가 아니라 농업 국가였습니다.
노동자계급이 독재한 것이 아니라 비노동자들이 노동자와 농민들을 지배하는 독재 국가가 되었습니다.
볼셰비키 혁명은 자본주의의 절정에서 자동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던 상태에서 인위적으로 발생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예상과는 달리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들의 임금은 상승했고, 여러 나라들이 실업 보험, 의료 보험 등의 사회 복지를 실시해 노동자들이 빈곤으로 추락하는 것을 방지하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어느 한곳에서도 혁명이 폭발하지 않았습니다.

러시아에서 발생한 혁명
18세기 표트르 대제를 통하여 러시아는 자타가 인정하는 대국이 되었습니다. 문학, 음악, 미술, 과학 등의 영역에서 유럽과 견줄만한 수준에 올랐고 더 뛰어난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의 백성 중 3/4는 농민이었습니다. 차르가 다스리는 극단적 형태의 독재국가였고, 차르에게 무한정의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이 있었고, 국가 전체를 소유했습니다. 사유재산권, 법률, 법정, 대의기구, 사회복지 등 산업화된 서구에 존재했던 공산혁명을 방지할만한 장치들이 러시아에는 전무한 상태였거나 아주 더디게 시작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 중이었던 러시아 내부에서는 형편없는 전쟁 수행에 대해 불만이 터져나오는 상황이었고, 대도시들의 심각한 인플레이션까지 더해져 국가가 통치 불능의 상태에 빠져있었습니다. 1917년 3월초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황제가 3월 15일 퇴위하게 됩니다.
임시정부라고 이름을 붙인 의회대표자위원회가 권력을 장악했고, 사회주의 지식인들이 노동자와 군인의 대표자 회의인 소비에트를 소집하여 약 7개월 가량 이원적 권력으로 구성된 정권이 러시아를 다스렸습니다.

혼란한 이 시기에 농민들은 사유지를 공격했고, 군인들은 전선을 이탈했고, 소수민족들은 자치정부수립이나 독립국을 주장했습니다. 사실상의 무정부상태였습니다.

레닌에게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레닌은 러시아가 자본주의 절정을 지나고 있다고 설정했고, 그렇기 때문에 혁명이 일어나야하고, 혁명을 위해 모든 적대세력과 임시적으로 연맹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농민은 원래 ‘프티 부루주아’ 즉 작은 부루주아로서 노동자의 원수로 분류되지만, 레닌은 혁명을 위해서 농민들을 이용한 뒤 토지 국유화로 굴복시킬 계획이었습니다. 소수민족의 민족의식도 정부를 무너뜨리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1917년 7월의 첫번째 쿠데타 시도는 실패했고, 이후 1917년 10월 23일에서 24일로 넘어가는 밤, 다시 혁명을 일으키기로 결정했고, 11월 7일 실행에 옮겨 정권을 차지했습니다.
사실 이때 노동자는 러시아 전체 인구 중에서 기껏해야 1~2%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혁명의 결과는 프롤레타리아트 노동자 계급의 독재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를 포함한 모든 계급들을 억누르는 독재였습니다.
레닌은 “독재란 권력을 말하는 것으로 어떤 것도 그것을 제한할 수 없고, 어떤 법률로도 한정할 수 없다. 또한 그것은 어떤 규칙으로도 금할 수 없으며 직접적으로 억압에 의존한다.”고 했고, “모든 사회 혁명이 실패한 것은 중도에서 멈췄거나 적대 계급을 관용했기 때문이며, 총체적이고 무자비한 폭력을 사용하여 새로운 질서의 터를 닦아야 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말대로 무자비한 폭력을 짧은 기간에 휘몰아치며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습니다.

3년간의 내전에서 수백만명이 목숨을 잃었고, 공산주의자들이 승리한 결과 1924년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합,
소련이 결성되었습니다.

공산당의 일당독재가 시작되고 여러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당이 국가의 모든 것을 맡아 관리하는 상황에서 거대하고 이기적이며 통제가 불가능한 관료주의가 나타났습니다.
비전문가들의 경제 운영과 내전의 영향까지 더해져 1929년 대규모 산업의 생산고는 1913년의 18퍼센트, 석탄생산은 27퍼센트, 철강 생산은 2.4퍼센트로 급락했습니다. 1921년 일자리를 가진 산업 노동자들의 수는 1918년의 반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1917년부터 1920년까지 소비에트의 경제상황은 인류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재앙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식량 생산도 감소했습니다. 식량 차출을 시도하자 상당수의 농촌지역에서 곡물을 차출하려는 군대와 농민 사이에 대격전이 벌어졌고 심지어는 적백내전보다 더 참혹한 양상을 띠었습니다.

농민들은 씨를 뿌리는 땅의 넓이를 줄여 압수당할 ‘잉여 곡물’의 양을 적게 했습니다. 생산량은 1913년도 7820만톤에서 1920년도 4820만톤으로 격감했습니다. 그 결과 520만명이 아사했습니다.

스탈린
1922년 5월 레닌이 뇌졸중으로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레닌은 공산주의의 역사적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며 분노했고, 수백명의 경제학자, 철학자, 기타 사회주의 혁명당에 속한 학자 등을 강제 추방했고, 정교회의 재산을 압수했습니다. 1923년 3월 다시 뇌졸중이 왔고 8개월 후 사망하기까지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스탈린은 당 내부에서 지위를 굳히기 위해 소비에트 관료집단을 이용했습니다. ‘노멘클라투라’라는 특권계급을 형성하여 식료품점, 병원, 휴양지, 양복점, 화장장 등의 사용권을 독점하게 했습니다. 스탈린은 레닌이 죽은 이후 후계 경쟁자였던 트로츠키를 중앙아시아로 추방하고, 확고한 당의 일인자가 되었습니다.

산업화와 집단화
스탈린은 1929년 제1차 5개년 경제계획을 시행했습니다. 산업노동자의 수는 300만명에서 640만명으로 증가했지만 노동자의 실제수입은 이것을 시행하기 전보다 1/10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산업화 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농민들에게서 자금을 거두었는데, 농민들은 최저 가격으로 식량을 공급해야 했기 때문에 사실상 정부의 노예와 다름없었습니다.

쿨락, 즉 공산정권의 산업화와 집단화에 저항하는 자들 180만명 가량이 수용소에 끌려가거나 시베리아로 추방되었습니다. 농민들은 농기구, 가축을 빼앗겼고, 집단화된 농민들은 국가가 정한 생산량을 채워야 했습니다. 농민 한 가구가 받은 연봉은 247루블이었는데 이것은 고작 한켤레 구두 정도밖에 살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생산량을 채우지 못한 농부들은 굶주렸고, 식량을 훔치는 자들은 1932년 8월에 시행된 법령에 따라 사형 혹은 10년간의 중노동에 처했습니다. 이 법이 시행된지 16개월만에 125,000명이 유죄판결을 받았고, 이중 5400명이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스탈린은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발생한 농민들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서 1932-1933년까지 인위적 기근을 발생시켰고 굶주린 농민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군대까지 배치했습니다. 이때 600~700백만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대 숙청
스탈린은 이후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대숙청을 시작했습니다. 레닌그라드 공산당 서기장 세르게이 키로프를 포함해 당 최고위 간부들을 제거했는데, 없는 죄를 자백하기까지 고문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공산당원과 일반국민까지 대숙청에 포함되었습니다. 정치국이 경찰 당국에 숙청 할당량을 주었는데, 해당 지방에 거주하는 주민의 몇퍼센트를 총살시키고 몇퍼센트를 수용소로 보낼 것인지 지시했습니다.
예를 들어 1937년 6월에는 모스크바에 35,000명이 할당되었고 이중 5000명은 총살할 사람의 수였습니다.

1934년에 개최된 제17차 전당 대회에서 선출되었던 중앙위원회의 139명 위원들과 후보 위원들 중 70퍼센트가 처형되었습니다.
15명 육군 대장 중 13명이, 9명의 해군제독 중 8명이 숙청을 당했습니다.
1937-1938년 성직자 165,200명이 예배를 드렸다는 이유로 체포되었고, 106,810명이 총살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숙청 담당기관의 수장까지 체포, 처형되었습니다.

소련 해체 후 비밀 문서 보관소에서 나온 증거에 따르면 1937-1938년 대숙청 절정기에 1,548,366명이 구금, 681,692명이 총살되었습니다. 하루 1,000명꼴로 처형된 것입니다.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범했을 당시에는 235만명, 전인구의 1.4퍼센트가 수용소에 들어가 국가노역에 강제로 동원되고 있었습니다.
이 대숙청으로 인해서 1932-1939년 동안 소련인구는 약 900만명 이상 감소했습니다.

마르크스는 ‘새로운 인간’이 나타나기까지 현재의 인간은 허깨비이므로 사라져주어야 한다고 했었습니다. 트로츠키는 인간이 스스로를 발전시킬 수 있으며, 의식적 기능이나 무의식적 기능까지, 호흡, 혈액순환, 소화, 생식 등을 모두 재구성한 초인이 될 수 있고, 인간이 결국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고 현명하며 미묘한 존재가 될 것이며 몸은 조금 더 조화롭게 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스탈린 사후
스탈린이 죽은 뒤에 흐루쇼프는 스탈린이 저지른 범행을 폭로하면서 잔인한 독재자의 흔적을 지우고자 했습니다. 스탈린의 초상화, 동상, 지명 등이 사라졌습니다.
스탈린의 후계자들은 마르크스의 이론과 달리 자본주의가 붕괴 직전에 이르러 비틀거리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고, 스탈린의 대결주의 전략을 버리고 비폭력적 수단을 이용하기 위하여 ‘평화 공존’을 새로운 구호로 삼게 되었습니다.


공산주의의 역사라는 책을 통해서 공산주의라는 이상, 공산정권, 스탈린의 사망까지 간략하게 살펴보았습니다.

공산주의의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한 가지는 ‘무신론’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대신 인간이 인간의 방법을 통해서 인간을 개조할 수 있고, 개조된 새로운 인간이 직접 지상천국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것이 공산주의입니다.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반대하는 인간을 죽이는 것에도 아무 거리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공산당의 지도자가 하나님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옳고 그름의 기준이 자기들에게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을 악인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악인의 최후는 심판입니다.

(시 10:4)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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